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작센 마이닝겐 게오르크 2세 - (1)

본문

반응형

작센 마이닝겐 게오르크 2세

 

 

근대 독일의 작은 공국 작센-마이닝겐의 군주였던 ‘게오르크 2세 공작’은 오늘 날 동·서양 연극사에서 “근대 연출가의 시작”, “근대의 첫 번째 연출가”, “연출술의 진정한 개혁가”, ‘연출가연극의 창조자’ 등의 칭호와 함께 “연극공작 ”이란 별칭으로 거론되는 매우 특별한 인물이다.

 

 


 

 

작스 마이닝겐과 스타니슬랍스키의 연출에 대한 공헌과 그림자

연출자로서 공작의 무한한 전권과 더불어 전제적 권위가 행사되었다. 이것은 그루베가 전한 바로 마이닝겐 극단의 무대에서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모두 한명의 연출자가 결정한 것에 복종해야 하며’,  공작의 조직은 군대식으로 돌아갔다”라는 증언에서도 방증된다. 게다가 그는 공작의 냉철한 훈육이 없었다면  위대한 결과들  결코 성취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한때 마이닝겐 극단-크로넥크의 연출법을 모방하며 연출의 전제주의”를 행사했던 스타니슬랍스키는 이후 자서전 나의 예술  인생』 (1924) 에서 게오르크 2세와 상반되는 배우본위의 연출론’을 펼쳤다. 요컨대, 그는 연극의 위대한 사상과 감정은 배우들이 창조해내는  속에 존재하며 연출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배우를 도와주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마이닝겐의 연출은 배우성,  배우의 역할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과 창조의 측면을 배려해야 하는 점에서 보면 확실히 부족 하다. 그들의 연출은 배우의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그것은 배우를 자신의 미장센에 따라 조정되는 모래알로 바꾸어 버리는 연출의 전횡이라고 마이닝겐 식의 연출적 경향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나아가 그는 마이닝겐 극단-크로넥크의 연습과정에 대해탐문하여 알게  바를  일례로 자서전에 수록하였다.  내용을 발췌·요약하면, ‘크로넥크는 연습 이외의 시간이나 공연 때는 극단의 심부름꾼과도 동료의식을 갖고 심지어 그들에게 아양을 떨기도  만큼 친절한 성품과 희극배우 특유의 쾌활함을 보였다. 그러나 연습이 시작되면 배우들에게 벼락같은 존재로서 냉담함과  압제의 옷을 입고 군림하였다. 그는 연습시간에 늦은 배우에게는  즉석에서 역할을박탈하여 다른 배우에게 넘겨주는 징계를 내렸고, 귀국한 후에는 그를 엑스트라 그룹 으로 강등시키는조치를 취하였다. 또한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단역들을 무대에 조금 늦게 투입시킨 조연출에 대해 공연이 끝난 후에 문책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이상에 의하면, 크로넥크는 연출자로서 불가항력적인 권위를 행사한 것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만의 연출 유형이기 보다는 공작이 만든 연출자 중심의 절대적인 복종체제’에서 비롯된것이었다. 한편, 공작-마이닝겐 극단의  같은 전제적 연출법과 독단적인지침들은 배우연극의 시대에 자기중심적인 배우들이 수용하기에는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러므로 이는극단이 점차 무명배우들로 채워지면서 마이닝겐 극단에는 일급 배우들이 부족하다”라는 평가를 얻게되는  요인이 되었다.  점에 대해 그루베는 마이닝겐 극단  집필한 시점에 현재 최상위 무대들의 일선은 대부분 마이닝겐 극단 출신 배우들이 차지하고 있다.  지금의 마트코브스키나 카인츠 같은 스타들은 극단에서 엄격한 훈련을 통해 비로소 연기의 기본을 배울  있었다’라고 강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타니슬 랍스키는“그 극단에는 재능있는 배우가  사람도 없다고들 한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바르나이가 있고 텔러 있다.         마이닝엔 극단에는 뛰어난 배우들이 적었다.마이닝겐의 작업은 배우들의 개성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준비된 배우들이 없다는 점에서   권한은 연출에게 넘겨지게되었고이것이 내가 마이닝겐 연출의 전제를 그럴수밖에 없다고 느꼈던 이유이다”라고 시각차를 보였다. 
출처 : 스타니슬랍스키 나의 예술인생
출처 : 스타니슬랍스키 나의 예술인생
 

 
마이닝겐 극단의 시작

게오르크 2세는 독일연방(1815-1866)의 작센-마이닝겐 공국에서 1826년에 베른하르트 2세 공작의 장자로 태어났다. 독일연방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바이에 른, 뷔르템베르크, 한노버 등지의 34개 영방국가와 4개 자유도시가 각각 독립된 주권을 가지고 모인 연합체로서, 영역은 남쪽의 오스트리아에 위치한 티롤부터 북쪽의 발트해까지 이르렀다.                                 

 (작센-마이닝겐 공국은 그 중부에 위치한 작센령의 공국들 중 하나로 면적이 2,500km2 정도인 작은 공국이었다.인구는 1846년 통계를 예로 보면 16만 명을 조금 넘었으며 주로 임업과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산림이 총면적의 40%를 넘는데다 구름이 많고 농경지는 적어서 비옥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외진 곳이어서 외부와의 교류도 적었다.)

 
베른하르트 2세는 대외적으로는 연방 내 중심세력인 오스트리아와 우호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대 내적으로는 자신이 애호하는 오페라의 정기적인 공연을 위해 1831년에 유럽연극사상 기념비적인 ‘마이닝겐 궁정극장’을 완공하였다.   
                                                       
(이 궁정극장은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고, 600개 좌석과 160개 입석을 구비했으며, 처음에는 궁내부 직속으로 관료들이 맡아서 운영하였다. 그들은 극장이 개관된 후로 30년 넘게 상설극단을 두지 않았고, 대신에 동호인극단이나 유량극단과 연간 단위로 계약을 맺어 겨울시즌 동안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오페라를 비롯한 음악극과 무용극 및 연극을 공연하는 방식을 유지하였다. 이에 극단은 공연목록을 대개 궁정 측의 요구와 희망에 따라서 편성하며 보통 일주일에 3일 을 공연하였다. 그러므로 공작이 선호하는 오페라는 일 주일에 한편씩 공연되었고, 레퍼토리는 볼프강 모차르트, 구스타프 로르칭, 카를 마리아 폰 베버, 바그너 등의 작품들 과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작품들까지 망라하였다. 그러나 연극은 유행하는 통속극이 미흡한 무대설비에서 공연되는 정도였다. 게다가 실러의《군도》같은 사회저항적 성격 을 지닌 작품들은 공연목록에서 제외되었다.)
 
독일연방은 1866년에 들어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계기로 붕괴되었다.  북부의 신흥 강국인 프로이센은 후장총과 철도의 신기술을 앞세워 전쟁에서 승리한 후,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남부 독일의 연방들을 배제시키고, 마인 강 이북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북독일연방의 창설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중부에 위치한 작센, 한노버, 헤센-카셀 령의 공국들은 처음에는 찬동하지 않았다. 프로이센이 이들의 영지를 침공하여 점령하자, 공국들은 결국 주권을 보장받는 것을 전제로 북독일연방에 가입하였다. 작센-마이닝겐 공국 역시 프로이센 군대에 점령당한 후 그 회원국이 되었다.  프로이센에 적대감을 갖고 있던 베른하르트 2세는 전시에 오스트리아를 도운 일로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의 눈 밖에 나서 9월 20일에 실각하였다. 이에 장자 게오르크가 양위를 받아 다음날인 21일에 공작 위에 올랐다.
 
1867년 2월에 정식 수립된 북독일연방(1867-1871) 은 표면상 22개 주권국가들의 연합체이나, 실상은 일찍이 프로이센 중심의 지배력이 작용하는 연방이었다. 그러므로 프로이센 왕이 군소 연방들에 대해 통제력을 발휘하는 정세에서, 게다가 지정학적으로도 변방이 된 작센-마이닝겐 공국은 사실상 더 이상 자주적인 국가라 할 수 없었다. 즉, 게오르크 2세는 대외적으로 정치력을 상실한 무력한 군주의 처지였다. 그런 현실에서 그는 마이닝겐 궁정극장에 눈을 돌렸고, 그와 함께 마이닝겐극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궁정극장의 공연과 행정 전반에 대한 개편
 
게오르크 2세는 1866년에 부친의 반대에도 무릅쓰며 우수한 배우들 여럿을 데리고 ‘마이닝겐 극단’ 을 결성하였다. 이로써 마이닝겐 궁정극장은 건축 후 35년만에 정식으로 상설극단을 두게 되었다. 첫 해의단원들 중에는 희극부문의 배우로 입단하여 공작의 핵심 조력자가 되는 크로넥크도 있었다. 
 
그는 우선 극장의 한정된 재정을 연극과 오케스트라 집중시켰다. 그리고 공연목록은 그 동안 궁정이 전통적으로 선호하는 오페라를 거의 다 빼고, 낭만주의적 특성들이 다분한 고전희곡들 위주로 개편하였다. 그 취지는 독일 관객에게 ‘우리의 고전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작품의 선정에서는 대중성이나 인기 코드가 아닌 문학적 가치를 기준으로삼았다. [1865/66년 시즌에 공연 된 70편의 작품들 중 음악극과 무용극은 오페라 18편, 오페레타 1편, 발레 1편, 리더슈필(19세기 초반 독일에서 생겨난 대중적 오페라의 일종) 2편으로, 총 22편 상당 그러나 1866/67년 시즌에는 연극 이 괴테, 소포클레스, 셰익스피어, 페르디난트 라이문트, 루트비히 홀베르크, 카를 구츠코프 그리고 잊힌 작가들과 그동안 배제된 실러의작품들까지 62편이나 공연되었다.] 
 
게오르크 2세는 1866/67년 시즌 말에는 극장의 운영진을 교체하였다.  그는 부친이 ‘1858년 궁정극장 개혁’ 당시에 임명한 시종무관 출신의 극장장 슈타인을 궁내시종으로 소환하였다그리고 새로운 극장장으로는 저명한 시인이자 셰익스피어 연구가로 알려진 보덴슈텟트를 초빙하였다그가 1863년에 영입한 배우이며 1864년부터 연출()장을 맡고 있는 그라보브스키는 예술감독을 겸직하도록 하였다

공작이 선택한 보덴슈텟트는 근년에 셰익스피어 희곡 번역집을 출간하였고 원서의 정확한 번역능력으로 인정받고 있는 당대 최고의 번역가였지만, 그때까지 연극제작에 대한 전문성이나 실무경험은 거의 없었던 그를 새로운 극장장으로발탁한 이유는, 게오르크 2세는 연극예술의 가치와 의미를인간의 가치관을 고양하고 교화하는 효용성에서 찾은 계몽적 공리적 예술관-연극관의 소유자’로서, 보덴슈텟트와는  익스피어 희곡’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작은 일찍이 16살무렵에《맥베스》를 직접 번역·각색한   었다.그  그는20년넘게‘ 다양한 경로로 셰익스피어극을 탐구’하였고,  과정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 작품은 대중의 교화와 오락을 위해  해하기 쉽게 밝혀주어야  심오한 가치들의 보고 라는 셰익스피어극관을 구축하였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셰익스피어극을 통해 안으로 대중을 교화하고 궁정극장  입지를 공고히 하며, 밖으로공국의 위상을 강화하려  뜻을 품었다.) 

 

그 후 그는 1867/68년 첫 시 즌에《로미오와 줄리엣》,《존 왕》등의 셰익스피어 작품 9 편과 독일의 고전희곡 4편 그리고 희랍 비극 1편을 무대에 올렸다. 이를 위해 그는 연극의 원안이라 할 희곡의 취급에서는, 기존의 배우나 연출자가 작품을 임의로 감축·삭제·각색·윤문하는 개작풍토에 대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야만적인 침해”로 보고 배격한 공작과 뜻 을 같이 하며, 훼손되지 않은 ‘순전한 원전(原典)의 복원과 충실한 장면화’에 목표를 두었다. 그리고 무대화 작업에서는, 전임 극장장 슈타인이 딩엘슈텟트와데브리엔트식을 추구하면서 기초한 역사적 사실주의 상연방식’을 계승하였다.

 

그 결과로, 마이닝겐 극단은 1867/68년 시즌에 예를 들면 독일의 셰익스피어극 공연사상 전에는 볼 수 없던 수 많은 장면을 무대 위에 복원시키는 성과를 드러냈다. 이에 관객들은 셰익스피어 원작의 외설적인 대사나 끔찍한 유혈장면의 광경까지 처음 비로소 생생히 경험할 수 있었다. 독일셰익스피어협회의 창설자 빌헬름 외헬호이저는 당시 마이닝겐에서 셰익스 피어극 3편을 관람하였고, 특히 공연의 섬세한 미적 표현과 역사적 정확성의 면을 들어서 호평하였다. 나아가 그는 ‘셰익스피어 희곡을 관행적으로 다루는 베를린, 빈, 드레스덴의 극장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로서 바이마르와 카를스루에 외에도 마이닝겐의 궁정극장을 지목’하였고, 이로써 연극 지형상의 판도변화를 예고하였다. 그의 평론은 곧 베를린의 쾨니히리헤 샤우슈필하우스( 왕립극장) 측과 그 수장 보토 폰 휠젠이 ‘수많은 지방극단들 중 대가들의 공연을 볼만한 곳 으로위의 두 곳 과 함께 마이닝겐을 주목’하는 반향을 가져왔다. 
 
그와 게오르크 2세 사이에 심각한 견해차가 드러났다. 그는 공작의 희곡을 본위로 하는 연극관, 이를테면 ‘연극은 작가의 정신과 작품의 본질에 충실한 시녀’라는 관점에 기본 적으로 동의하였다. 하지만 역사극에 담긴 “역사적 오류” 의 문제 있어서만큼은 견해는 달리하였다. 그는 그것 역시 작가의 문학적 성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수정과 변경을 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공작은연극과 관련된 예술적 요소들 “일체에 대한 포괄적 역사 주의의 견지에서, ‘역사적 사실성’에 맞도록 오류를 정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요컨대, 공작이 생각하는 ‘원전에 충실함’이란희곡 원전의 복원과 함께 그 배경을 이룬 역사적 사실성까지 확보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원전의 복원을 위한 근거자료의 수집은 물론이며, 작품의 배경과 줄거리, 등 장인물의 특성과 특징 등의 전반을 역사적 맥락에서 ‘연구하고 헤아려서 조명하고’, 나아가 작가의 정신과 미적 관점에 의거하여 ‘해석하는’ 일련의 연구 과정을 필요로 하였다.
이 문제 외에도, 보덴슈텟트는 공작의 지나친 간섭과 관여로 인해 자신은 ‘이름뿐인 극장장’이란 현실에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공작이 보기에 그는 극장의 행정업 무와 연극제작의 면에서 ‘평론가 프렌첼 마저 사족으로 여길 만큼’ 경험과 감각의 면이 미숙하였다. 보덴슈 텟트는 이러한 갈등으로 1869년 말에 결국 극장장 직을 중단하였다. 그 후 그는 문인으로 활동하면서 공작의 조언자로 남았고 마이닝겐 궁정과도 공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공작은 1870년에 들어서 교육은 부족하지만 재능과 경험이 많은 예술감독 그라보브스키를 새로운 극장장으로 임명하였다. 
 

 

 

작센 마이닝겐 게오르크 2세 - (2) 로 이어집니다 :-)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