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독일의 작은 공국 작센-마이닝겐의군주였던 ‘게오르크2세공작’은오늘 날동·서양연극사에서 “근대 연출가의 시작”, “근대의 첫 번째 연출가”, “연출술의 진정한 개혁가”, ‘연출가연극의 창조자’ 등의 칭호와 함께 “연극공작 ”이란 별칭으로 거론되는 매우 특별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것은그만의연출유형이기보다는공작이만든‘연출자중심의절대적인복종체제’에서비롯된것이었다.한편,공작-마이닝겐극단의이같은전제적연출법과독단적인지침들은배우연극의시대에자기중심적인배우들이수용하기에는어려운조건이었다.그러므로이는극단이점차무명배우들로채워지면서“마이닝겐극단에는일급배우들이부족하다”라는평가를얻게되는한요인이되었다.이점에대해그루베는『마이닝겐극단』을집필한시점에‘현재최상위무대들의일선은대부분마이닝겐극단출신배우들이차지하고있다.또지금의마트코브스키나카인츠같은스타들은극단에서엄격한훈련을통해비로소연기의기본을배울수있었다’라고강변하기도했다.
게오르크2세는 독일연방(1815-1866)의 작센-마이닝겐공국에서 1826년에 베른하르트 2세 공작의 장자로 태어났다. 독일연방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바이에 른,뷔르템베르크,한노버등지의 34개영방국가와4개 자유도시가 각각 독립된 주권을 가지고 모인 연합체로서, 영역은 남쪽의 오스트리아에 위치한티롤부터북쪽의 발트해까지 이르렀다.
(작센-마이닝겐공국은 그 중부에 위치한작센령의공국들 중 하나로 면적이 2,500km2 정도인 작은공국이었다.인구는1846년 통계를 예로 보면 16만 명을 조금 넘었으며 주로 임업과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산림이 총면적의 40%를 넘는데다 구름이 많고 농경지는 적어서 비옥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외진 곳이어서 외부와의 교류도 적었다.)
베른하르트 2세는 대외적으로는 연방 내 중심세력인 오스트리아와 우호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대 내적으로는 자신이 애호하는 오페라의 정기적인 공연을 위해 1831년에 유럽연극사상 기념비적인 ‘마이닝겐궁정극장’을완공하였다.
(이 궁정극장은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고, 600개 좌석과 160개 입석을 구비했으며, 처음에는 궁내부 직속으로 관료들이 맡아서 운영하였다. 그들은 극장이 개관된 후로 30년 넘게 상설극단을 두지 않았고, 대신에 동호인극단이나 유량극단과 연간 단위로 계약을 맺어 겨울시즌 동안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오페라를 비롯한 음악극과 무용극 및 연극을 공연하는 방식을 유지하였다. 이에 극단은 공연목록을 대개 궁정 측의 요구와 희망에 따라서 편성하며 보통 일주일에 3일 을 공연하였다. 그러므로 공작이 선호하는 오페라는 일 주일에한편씩공연되었고, 레퍼토리는 볼프강 모차르트, 구스타프로르칭, 카를 마리아 폰베버, 바그너 등의 작품들 과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작품들까지 망라하였다. 그러나 연극은 유행하는 통속극이 미흡한 무대설비에서공연되는 정도였다. 게다가실러의《군도》같은사회저항적 성격 을 지닌 작품들은 공연목록에서 제외되었다.)
독일연방은 1866년에 들어서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을계기로 붕괴되었다.북부의 신흥 강국인 프로이센은 후장총과 철도의 신기술을 앞세워 전쟁에서 승리한 후,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남부 독일의 연방들을 배제시키고, 마인 강 이북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북독일연방의창설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중부에 위치한 작센,한노버,헤센-카셀령의 공국들은 처음에는 찬동하지 않았다. 프로이센이 이들의 영지를 침공하여 점령하자, 공국들은 결국 주권을 보장받는 것을 전제로북독일연방에가입하였다. 작센-마이닝겐공국 역시 프로이센 군대에 점령당한 후 그 회원국이 되었다.프로이센에 적대감을 갖고 있던 베른하르트 2세는 전시에 오스트리아를 도운 일로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의 눈 밖에 나서 9월 20일에 실각하였다. 이에 장자게오르크가양위를 받아 다음날인 21일에 공작 위에 올랐다.
1867년 2월에 정식 수립된북독일연방(1867-1871) 은 표면상 22개 주권국가들의 연합체이나, 실상은 일찍이 프로이센 중심의 지배력이 작용하는 연방이었다. 그러므로 프로이센 왕이 군소 연방들에 대해 통제력을 발휘하는 정세에서, 게다가지정학적으로도 변방이 된 작센-마이닝겐공국은 사실상 더 이상 자주적인 국가라 할 수 없었다. 즉,게오르크2세는 대외적으로 정치력을 상실한 무력한 군주의 처지였다. 그런 현실에서 그는마이닝겐궁정극장에 눈을 돌렸고, 그와 함께마이닝겐극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궁정극장의 공연과 행정 전반에 대한 개편
게오르크2세는 1866년에 부친의 반대에도 무릅쓰며 우수한 배우들 여럿을 데리고 ‘마이닝겐극단’ 을 결성하였다. 이로써마이닝겐궁정극장은 건축 후 35년만에 정식으로 상설극단을 두게 되었다. 첫해의단원들중에는 희극부문의 배우로 입단하여 공작의 핵심 조력자가 되는크로넥크도있었다.
그는 우선 극장의 한정된 재정을연극과 오케스트라에집중시켰다. 그리고공연목록은 그 동안 궁정이 전통적으로 선호하는 오페라를 거의 다 빼고, 낭만주의적 특성들이 다분한고전희곡들위주로 개편하였다.그 취지는독일 관객에게 ‘우리의 고전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기위함’이었다.작품의 선정에서는 대중성이나 인기 코드가 아닌 문학적 가치를기준으로삼았다.[1865/66년 시즌에 공연 된 70편의 작품들 중 음악극과 무용극은 오페라 18편, 오페레타 1편, 발레 1편,리더슈필(19세기 초반 독일에서 생겨난 대중적 오페라의 일종) 2편으로, 총 22편 상당 그러나 1866/67년 시즌에는 연극 이 괴테, 소포클레스, 셰익스피어, 페르디난트라이문트, 루트비히홀베르크, 카를구츠코프그리고 잊힌 작가들과 그동안 배제된실러의작품들까지 62편이나 공연되었다.]
그 후 그는 1867/68년 첫 시즌에《로미오와줄리엣》,《존왕》등의셰익스피어 작품 9 편과 독일의고전희곡4편 그리고 희랍 비극 1편을 무대에 올렸다. 이를 위해 그는 연극의 원안이라 할 희곡의 취급에서는,기존의 배우나 연출자가 작품을 임의로감축·삭제·각색·윤문하는개작풍토에 대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야만적인침해”로보고 배격한 공작과 뜻 을 같이 하며, 훼손되지 않은 ‘순전한 원전(原典)의 복원과 충실한장면화’에목표를 두었다. 그리고 무대화 작업에서는, 전임극장장‘슈타인이딩엘슈텟트와데브리엔트식을추구하면서 기초한 역사적사실주의상연방식’을계승하였다.
그 결과로,마이닝겐극단은 1867/68년 시즌에 예를 들면 독일의 셰익스피어극 공연사상 전에는 볼 수 없던수 많은 장면을 무대 위에 복원시키는 성과를 드러냈다. 이에 관객들은 셰익스피어 원작의 외설적인 대사나 끔찍한 유혈장면의 광경까지 처음 비로소 생생히 경험할 수 있었다.독일셰익스피어협회의창설자 빌헬름외헬호이저는당시마이닝겐에서셰익스피어극3편을 관람하였고, 특히 공연의 섬세한 미적 표현과 역사적 정확성의 면을 들어서 호평하였다. 나아가 그는 ‘셰익스피어 희곡을 관행적으로 다루는 베를린, 빈, 드레스덴의 극장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로서 바이마르와카를스루에외에도마이닝겐의궁정극장을지목’하였고, 이로써 연극 지형상의 판도변화를 예고하였다. 그의 평론은 곧 베를린의쾨니히리헤샤우슈필하우스( 왕립극장) 측과 그 수장 보토 폰휠젠이‘수많은 지방극단들 중 대가들의 공연을 볼만한 곳으로위의 두 곳과 함께마이닝겐을주목’하는반향을 가져왔다.
그와게오르크2세 사이에 심각한 견해차가 드러났다. 그는 공작의 희곡을본위로하는 연극관, 이를테면 ‘연극은 작가의 정신과 작품의 본질에 충실한시녀’라는관점에 기본 적으로 동의하였다. 하지만역사극에 담긴 “역사적 오류” 의 문제에있어서만큼은견해는 달리하였다. 그는 그것 역시 작가의 문학적 성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수정과 변경을 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공작은연극과관련된 예술적 요소들 “일체에 대한 포괄적 역사 주의의 견지에서, ‘역사적사실성’에맞도록 오류를 정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요컨대, 공작이 생각하는 ‘원전에충실함’이란희곡 원전의 복원과 함께 그 배경을 이룬 역사적 사실성까지 확보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원전의 복원을 위한 근거자료의 수집은 물론이며, 작품의 배경과 줄거리, 등 장인물의 특성과 특징 등의 전반을 역사적 맥락에서 ‘연구하고 헤아려서 조명하고’, 나아가 작가의 정신과 미적 관점에 의거하여 ‘해석하는’ 일련의 연구 과정을 필요로 하였다.
•이 문제 외에도,보덴슈텟트는공작의 지나친 간섭과 관여로 인해 자신은 ‘이름뿐인극장장’이란현실에 불만을 드러냈다.하지만 공작이 보기에 그는 극장의행정업무와 연극제작의 면에서 ‘평론가프렌첼마저 사족으로 여길 만큼’ 경험과 감각의 면이 미숙하였다.보덴슈텟트는이러한 갈등으로 1869년 말에 결국극장장직을 중단하였다. 그 후 그는 문인으로 활동하면서 공작의 조언자로 남았고마이닝겐궁정과도 공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공작은 1870년에 들어서 교육은 부족하지만 재능과 경험이 많은 예술감독그라보브스키를새로운 극장장으로 임명하였다.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