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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폰 쉴러와 그의 작품 [군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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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폰 실러(1759년11월 10일 ~ 1805년 5월9일) 

 

괴테와 함께 독일 고전주의의 2대 문호로 일컬어진, 독일고전주의 극작가이자 시인, 철학자, 역사가, 문학이론가이다. 실러의 초기 비극은 정치적 억압과 전제적 사회 관습을 공격한 것이었으나, 후기 희곡들은 육신의 허약함을 초월하고 물리적 건들을 극복하는 영혼의 내적 자유에 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1802년 귀족칭호를 받았다.

 

그의 작품들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바탕으로 하여, 1800년대와 1848년 혁명기의 독일인들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독일 남서부 뷔르템베르크주에 있는 마르바흐에 거주하는 하급 군의관의 1남 5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신학을 전공해 목사가 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영주인 카를 오이겐 공작의 명령으로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엔 법학을 공부했으나 의학으로 전공을 바꾼 그는 졸업 후 슈투트가르트에서 하급 군의관이 됐다. 그 후 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으로서 슈투트가르트 연대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카를 사관학교를 다니며 엄격한 전제적인 규율 속에서 청년기를 보낸 실러는 최초의 희곡인 <군도>를 통해 숨 막히는 관습과 고위층의 부패에 대한 맹렬한 저항을 표현했다.

 

그는 학생 시절에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유에 대한 동경이 싹터 저작에 몰두하였는데, 몰래 문학작품을 탐독하며 습작을 했다. 철학 교수 아벨의 권유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은 것은 그에게 충격적인 체험이었다. 자비 출판한 첫 작품 <군도>는 독일 귀족 계급의 횡포에 대한 반항적 작품으로, 이 작품이 1782년 1월 13일 만하임에서 성공적으로 초연되자 실러는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연대 의무관이 되어 집필활동을 금지당했기에 공작의 저술 금지령을 피해서 1782년 9월 22일 밤에 만하임으로 도주했다. 도피 방랑생활을 하면서 <Fiesco의 반란>(1783), <간계와 사랑>(1784)을 썼다.

 

한때 만하임 극장의 전속 작가가 되었으나 중병을 앓고 사퇴한 후 크리스티안 쾨르너의 도움으로 《돈 카를로스》를 완성(1787)했다. 1787년에 네덜란드독립사를 연구, 인정을 받아 1789년 예나로 이주하여 예나 대학의 비정규직 교수가 되었다. 그 후 미학, 철학, 역사에 관한 논문을 잇달아 발표하여 생활의 안정을 얻고 역사와 미학 강의를 했지만 학생 수의 감소와 신병으로 얼마 후 사직했다.

 

+쉴러는 정신의 정화, 독일의 저명한 작가들과의 경쟁, 그리고 안정된 시민 생활의 장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1787년에 쉴러는 바이마르로 가서 헤르더, 빌란트, 그리고 괴테와 교우 관계를 맺기를 희망했다. 그는 역사 연구에 전념하여, 역사 속에 광범위하게 담겨져 있는 객관적인 삶의 자료와 도덕적 결단의 전면에 섰던 거룩한 시대, 그리고 인간 정신의 웅대한 활동을 발견하려고 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네덜란드의 독립사이다>.

 

1794년부터 괴테와 교분하여 함께 《크쎄니엔》이라는 시집을 내기도 하며, 이들은 자주 만나 문학에 관해 대화하고 많은 서신을 교환하며 공동 작업을 했다. 특히 1802년에는 실러가 예나에서 바이마르로 이사해 이들의 공동 작업은 더욱 확대됐다.

1799년경부터 실러는 만년의 희곡 창작의 시기에 들어가,《발렌슈타인》3부작 (1799),《마리아 슈투아르트》(1800),《오를레앙의 처녀》(1801), <메씨나의 신부>(1803), 《빌헬름 텔》(1804) 등의 대표작을 써서 괴테와 견주는 대작가가 되었다. 희곡의 대부분은 운명과 대결하는 의지의 힘을 묘사한 것으로서 그리스 고전극 정신의 재생을 지향하고 있다. 1805년 5월 9일 폐렴(아마도 폐결핵에 따른)으로 바이마르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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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장편 〈영혼을 보는 사람〉(1787/89)은 생계를 위해 쓴 것으로,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것은 드라마에도 나타난 쉴러의 측면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 작품은 비밀과 음모에 의하여 조종되고 있는 숨막히는 추리 소설이다. 여기에는 우유부단한 왕자를, 음모를 일삼는 악당의 비밀 조직의 그물에 걸려들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직은 빌란트와 장 파울의 소설, 그리고 괴테의 〈큰 바보〉에서도 취급되어 있다.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뷔르템베르크의 노상 강도의 이야기를 취급한 〈범죄자〉(1786) 이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1854년에 헤르만 쿠르츠가 〈태양관 주인〉을 썼다. 쉴러는 〈영혼을 보는 사람〉에서 인간 사회의 이상한 사건을 심리적으로 훌륭하게 처리하여 소설가로서의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퇴폐적인 로코코 문화의 도시 베니스를 무대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비판적 사회 소설의 효시이며, 괴테가 소설 산문을 상징적으로 구성하기 이전에 소설 기법의 정점에 선 작품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여러 모티브는 그의 드라마에도 나타나지만, 그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대담한 범죄, 권모술수를 일삼는 정치, 사기꾼, 그리고 음모와 테러의 힘에 그 역점을 두고 있다. 동시에 이 작품에는 쉴러의 청년 시대의 관념적인 세계관이 칸트의 철학에 접하게 되는, 과도기에 있어서의 그 자신의 세계관의 갈등이 나타나 있다. 쉴러는 이와 같은 오락 위주의 작품을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짧은 시일내에 몇 번이나 번역되어, 많은 독자층의 호평을 받은 바 있는 이 소설을 중단해 버렸던 것이다. 여기에는 소재에 대한 흥미가 산문 기법에 대한 이해보다도 더 능가했지만, 그러나 쉴러는 소설 작가로서, 그리고 나중에는 역사가와 철학적 작가로서 산문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한 것이었다.


 

 

실러의 칸트연구

 

경제적인 궁핍과 지병은 쉴러의 신혼 생활을 어둡게 했다. 폐결핵은 그를 일찍 세상을 떠나게 한 원인이 되었지만, 이것은 이미 슈투트가르트 시절에 발병한 것 같다. 이 병은 악화되어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없도록 했다. 만하임에서 쾨르너의 도움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그에게 행운의 손길이 뻗쳐 왔다. 1791년에 그의 사망에 대한 오보가 인연이 되어, 홀슈타인-아우구스텐부르크 공과 덴마크의 심멜만 백작이 거액의 연금을 3년간이나 지급해 주었던 것이다. 이 연금 덕분으로 쉴러는 칸트 철학을 연구하여, 그의 예술적 자각을 높일 수 있었다.

"예술 작품은 그 자신의 미의 규칙에만 책임을 지면 그만이며, 다른 어떠한 요구에도 복종해서는 안 된다." 쉴러의 이 기본적인 인식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 · 로마의 고전적 해석과 칸트의 미학은 괴테의 예로 보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쾨르너는 이전부터 쉴러에게 쾨니히스베르크의 철학자 칸트를 연구하도록 권유해 왔다. 

1790년에 칸트는 〈판단력 비판〉을 발표했다. 그는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를 초월하여 새로운 인식론과 도덕 철학, 자연 철학 및 미학을 포괄하는 지식을 수립했다. 그는 신, 자유, 그리고 불멸을 신앙과 신념에 관한 문제로서 증명이 가능한 논리적 인식의 영역에서 제외시키고, 행복을 도덕적 행위의 목적으로 삼는 것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절대적인 선으로서의 의무를 역설했다.

그는 선의 표현인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도덕적 행위를 선택하는 인간의 자유를 인간의 성향에 반하여 철저하게 요구되는 절대적인 의무로 보았다. 쉴러는 수년간에 걸쳐서 칸트 연구에 몰두했는데, 이것은 윤리학자이자 예술가이며, 또한 미학자로서 자기와 자기의 관심사를 명백히 하고, 철학적 개념을 근거로 하여 확고한 기초를 쌓아 두기 위한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 · 로마, 역사, 칸트 철학 및 괴테와의 제휴는 고전적 미학과 인간성의 법칙에 따라서 객관적인 예술가로 되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였다. 이것을 쉴러는 1793년 이후의 그의 철학 논문과 미학 이론에서 매우 선명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쉴러는 너무 엄격한 의무론에 강력히 반대하고, 완전한 덕성은 의무와 인간의 성향이 조화적으로 화합하는 경우에 한하여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소위 '아름다운 영혼'이란 미학적 의미에서 이와 같이 조화가 이루어진 경우라고 생각했다. 그의 논문 〈우미와 품위 〉(1793)에서는 이와 같은 정신적 완전성이 이중의 표현으로서 해명되어 있다. 즉, 우미 속에는 정신과 육체의 미가 미적 조화로서 융합되어 있으며, 품위 속에는 인간의 자연적 성향과 도덕적 의무가, 강요되지 않은 통일체로서의 물질적 · 감각적인 구속의 저항을 뿌리치고 승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교양인은 우미와 품위의 모습을 갖추고 나타난다. 도덕과 미는 서로 손을 잡고 완성된 인간성을 만드는 것이다.

 

 


 

 

 

실러와 괴테

 

괴테는 자연과 경험을 중시하는 자칭 ‘완고한 리얼리스트’였기에 이념에 매달리는 철학적 사변이 창작에 해가 된다고 믿었다. 실러의 미학 이론을 빌려 말하면 괴테는 ‘소박한 문학’을, 자신은 ‘감상적 문학’을 추구했다. 괴테가 ‘현실 그대로’를 바라본다면, 실러는 ‘이상세계’를 바라본다. 한 사람은 식물을 보고 ‘경험’이라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이념’이라고 했을정도로 바라보는 세계가 다른 두 사람, 괴테의 표현대로 ‘대척적인 정신들’은 서로를 인정했기에 벗이 되었고,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지만 똑같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괴테는 실러와의 만남을 ‘행운의 사건’이라고 말했다. 두 작가는 상대 작품에 대한 격려와 비판으로 결점을 서로 보완해 주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괴테의 에그몬트와 실러의 빌헴름 텔이다. 또 실러는 괴테가 파우스트를 완성할 수 있도록 독려했고, 두 사람이 함께 <크세니엔>이라는 시집을 공동 집필을 하는 등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완성해나가며 문학적 동지로 평생을 함께한 두 사람. 1799년에 실러는 예나대학의 교수직을 포기하고 바이마르로 이주하기에 이른다. 괴테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베토벤은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전 괴테나 실러의 작품을 읽으며 잠이 들었을 정도로 두 문호를 존경했고, 베토벤 9편 교향곡 중에서 마지막 작품인 제9번 합창 교향곡 4악장에는 실러의 시 「환희에 부침」의 시를 사용했을 만큼 이들의 작품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독일 바이마르에 가면 괴테와 실러의 동상이 같은 곳에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괴테는 "자유의 이념은 실러가 스스로 발전해가며 다른 사람이 되어감에 따라 다른 형태를 띠게 되었다. 젊었을 때는 육체적 자유가 그를 사로잡아 작품에 반영되었으나 말년에는 정신적 자유에 몰입했다"고 말했다. 

실러의 초기 비극은 정치적 억압과 전제적 사회 관습을 공격한 것이었으나 후기 희곡들은 사람이 육신의 허약함을 초월하고 물리적 외부조건들을 극복하는 영혼의 내적 자유에 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이 희곡들은 현세가 바라는 것과 영원한 도덕적 질서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주인공이 이러한 갈등 속에서도 성실성을 지키고자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성찰적인 시와 논문들을 통해서 그는 예술이 내적 조화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과 시민 각자의 '미적 교육'을 통해 보다 행복하고 인간적인 사회질서를 계발할 수 있는 방법들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그의 미학에 대한 성찰문들은 정치적·역사적 사상과 연계되어 있다. 실러의 모든 저작이 지닌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현대성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깜짝 놀랄 만큼 20세기의 생활과 연관성을 지닌다. 한동안 독일 지식인들의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그의 역작들이 지닌 항구적인 가치는 어떤 비평의 시류에도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지출처 : 네이버 검색창


 

다음글에선 프리드리히 폰 쉴러와 그의 작품 [군도] (2)로 그의 작품 중 하나 군도에 관한 글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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