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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사] 해방전-1990년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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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블로거 2-60의 티스토리 블로그입니다 :-)

이번 글에서는 한국연극사 [해방전-1990년대 이후] 에 대해 적어보려고합니다.

 


 

1. 해방 전 :  왜곡으로부터의 자유-일본의 영향과 그 극복

 

해방 전 한국의 사실주의 연기는 대체로 두 가지의 커다란 동기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지금까지 강조되어왔듯이 일본을 통한 서구 근대극적 연기의 도입이요, 또 하나는 자생적인 것으로서 우리 자체 내에서 전래의 전통연희나 일본 신파의 영향과 같은 시대적 질곡과 갈등하고 싸우며 연기를 통해 서투르나마 현실을 진실되게 반영해 보려는 의지였을 것이다.
해방 전의 근대극의 경우, 1920년대 초부터 시작된 동경유학생들의 하계순회공연과 토월회 등에 의해 시발되었으며 1930년대에 와서 심화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듯이, 해방전의 사실주의극도 근대극 의 이런 도입과 발전과정의 일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철

 

1930년대 이전의 연기, 특히 사실주의 연기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이렇다할 연구가 없으나 이시기의 현철은 우리 근대 연기사를 논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동경유학생 출신으로서 당시 개벽지의 학예부장이었던 그는 여러 가지 근대극 이론을 소개하고 번역가로도 활동한 선구자적 인물로서 1920년 최초의 연극학교인 예술학원에서의 시행착오를 거쳐 1923년에 조선 배우학교를 세웠다.

 

학생들과의 마찰로 학교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으나 1회 졸업공연으로 인형의 집 을 최초로 번역, 공연하기도 했으며 복혜숙, 이경손 등 연기자를 길러내기도 했다연기를 어느 정도 체계화시켜 본격적으로 교육하려했던 그의 업적은 한국 최초의 것이며,여러가지로 전문화 수업제목과 인형의 집을 공연했다는 점들을 볼 때, 어느 정도 근대적 요소를 지닌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연기론이 아직 체계를 갖춘 사실주의에 입각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는 일본유학시절 낭만주의적 사실주의에 속하는 시마무라 호게츠의 연구생으로 사사했으며 아직 스타니슬랍스 키를 접하지 못한 상태였다.또한 그의 연기론이 당시에 현실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거나 주된 흐름으로 계승되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1930년대의 사실주의 연극은 극예술연구회로 대변된다. 극연의 목적은 진정한 의미의 우리 신극 수립하는 것으로서 그들이 말하는 신극이란 축지 소극장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신극운동과 멀리는 애란을 포함한 유럽 근대극의 소극장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극연으로 대변되는 한국 근대극이 지향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사실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한국의 참담한 현실을 무대에 올려놓 는 것이 곧 사실주의요, 근대극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홍해성

극예술연구회의 중심에는 동경에서 돌아온 홍해성이 있다.

대부분이 해외문학을 전공했던 동경유학생 출신으로서 연극동호인에 불과했던 여타 극연 회원들과 달리 홍해성은 일본대 예술대에서 수학한 후 축지 소 극장에 들어가 1924-1928년까지 일본 근대극의 선구자인 오사나이 가오루에게서 근대극의 이론과 실제를 익히며 실제로 50편 이상의 작품에서 연기와 연출로 참여했다.
 
그 후 귀국한 홍해성은 이를 바탕으로 해서 실기와 이론적 지식을 갖춘 최초의 전문 연극인으로서 근대 극론에 입각한 연기론과 연기를 본격적으로 전하고 보급했다고 알려져 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연기와 연출에 관한 주목할 만한 글들을 발표하 기도 했다. 그 중 1931년에 발표된 그의 연기론 무대예술과 배우는 오늘날 우리가 당시의 연기적 상황에 대해 지니는 선입견에 비추어 볼 때 대단히 전문적이다.

얼마 전까지 대부분의 국내 학자들은 홍해성을 최초로 일본을 통 해 근대적 연기와 연출을 제대로 배워온 인물 스타니슬랍스키를 소개 한 인물 사실주의 연기론을 소개한 인물이라는 식의 당연한 전제하에 논해왔다. 물론 홍해성의 연기론에 많건 적건 스타니슬랍스키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초기 연극사가들은 스타니슬랍스 키 연기론이 곧 사실주의 연기론이라는 상식에 입각해 홍해성의 연기론 이 곧 스타니슬랍스키 연기론이며 그가 곧 사실주의 연기론을 도입한 것이라고 말해왔던 것이다. 그 근거로는 홍해성이 오사나이 가오루에게 서 배웠고, 오사나이는 서구에서 배워 온 스타니슬랍스키 이론으로 근대 적 극장인 축지 소극장을 끌어왔다는 식의 다소 막연한 논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전제와 추론들은 최근 들어 조금씩 재고되고 있 는 분위기이다. 홍해성이 일본에서 배운 것이 무엇이며, 그가 과연 간 접적으로나마 스타니슬랍스키를 제대로 배우고 왔으며, 그의 연기론이 과연 사실주의 연기론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등을 다시 검토해 볼 필요 가 있다는 것이다.

 
우선 홍해성이 사사했다는 오사나이 가오루 자신이 유럽에서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론을 제대로 배워왔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오사나이가 그의 연극작업의 일환으 로 자신이 모스크바에서 보고온 스타니슬랍스키식 연기법과 연출론의 재현에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사실이다그런데 오사나이가 서구를 방문 한 1912-13년은 스타니스랍스키가 초기의 심리적 연기론의 윤곽을 겨우 잡았던 시기로서 그가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론을 심층적으로 접하기 에는 이른 시기이다.
 
, 나상만에 의하면 오사나이는 스타니슬랍스키에 게 직접 배우거나 공연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약 한달 동안 모스크바 예술극단에서 연습과정을 견학하며 메모한 정도였다고 한다. 다시 말해 오사나이는 단지 보는 과정에서 경험적 이해를 통해 터득했던 것 같다.
 
둘째로, 당시 오사나이 가오루나 축지소극장이 과연 스타니슬랍스키 의 연기론에 얼마나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의 문제이다. 오사나이는 원래 연기보다는 연출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작업해왔으며 그의 근대극 업적 중 취약점의 하나는 연기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자유극장 시절부터 입센이나 고르키를 공연하면서 가부끼 배우들로부터 가부끼식 연기나 신파적 연기를 제거하기 위해 고민했으나 답보상태를 면치 못했고 결국 축지 소극장 때도 새로운 근대 적 연기술을 도입하는데는 실패했다.
 
이상의 사항들을 종합해 볼 때 홍해성이 오사나이 가오루나 축지 소 극장에서 배운 연기는 그다지 체계적이지 못했으며 사실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서구 근대극의 양식이 반영된 것이었다고 추측된다. 따라서 1930년 귀국한 홍해성이 스타니슬랍스키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과 경험은 상당히 보유했을지 모르나 스타니슬랍스키론을 일부라도 체계적으로 이 해했으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실제로, 1931년 그가 발표했던 무대예술 과 배우 에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론 뿐 아니라 스타니슬랍스키 연기론과 관계없거나 상충되는 언급들이 상당부분 포함되어있다.

 
이처럼 1930년대의 사실주의 연기는, 사실주의를 다름 아닌 현실 반영의 욕구라고 본다면 개화초기 동경유학생들에 의한 우리 연극에도 소박하나마 사실 주의 사실주의() 연기 대한 갈망이 싹트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본적 욕구는 그 이후 계속되어 1960년대까지의 한국의 근 대극은 대체로 사실주의를 지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1930년대를 전후한 당시 우리 연극계에서 사실주의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제대로 이루어졌었는가는 알 수 없다. 한 예로 서양 문학이입의 전성기였다고 하는 1930년부터 1936년까지의 6년 동안에도 사실주의 연극 자체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찾기는 힘들다. 골스워디, (J. M. Synge), 오케이시, 고리끼, 체홉 등 개별적인 작가론이나 희곡의 번역들이 주로 소개되었고 사실주의극은 근대극 일반의 소개 속에 잠깐 포함되었을 뿐이다.

대극과 자연주의극에 관심을 가졌던 김우진은 자연스럽게라는 말은 본래의 전설의 모든 부자연하게, 극단하게 되어온 것에 대한 반항이다라고 보았고, 역시 근대극을 소개했던 함대훈은 모스크바 예술좌는 최초로 엄밀한 자연묘사로써 실인생의 심영을 무대상에 창조하고 이에 의하야 구식 연기의 인공과 과장에서 탈각하려고 하였다 파악 하고 있다.

유민영 역시 우리의 사실주의가 신파에 대한 부정과 극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신파로는 우리 현실을 표현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일부 연극인들의 신파 부정 심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극예술연구회는 당시의 흥행연극이었던 신파를 축출하는 것을 신극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었다. 극연의 목적의 하나는 기성극단의 사도의 흐름을 구제하는 이었다.

오사나이의 축지에서의 작업 역시 비슷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즉 근대극을 지향했던 그의 작업은 무엇을 지향했다기보다는 무엇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일본 신극운동 을 벌였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이해랑의 회상도 주목할 만 하다.

 

그는 해방 후의 사실주의 계열의 연극으로서 엄청난 관객을 동원하며 성공했던 신협(국립극단)의 뇌우에 대해 사실은 신협이 그때 그런 리얼리즘연극의 창조를 의식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신파 연극과 대조적으로 구별되는 예술적 연극을 창조하려는 개념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투철하게 리얼리 즘에 입각, 연극을 창조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해방 전부터 연기를 해왔던 김동원도 사실주의는 신파 혐오에서 비롯되었다 증언했다.이렇듯 해방전의 사실주의적 연기는  그런 일본식 연기의 왜곡과 과장으로부터의 자유의지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2.해방 후-1960년대 : 내면적 진실 이해랑과 스타니슬랍스키

 

해방 전의 사실주의적 연기는 해방을 거쳐 전란 후 1950년대나 1960년대 이후까지도 그 맥을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적지 않은 연극인들이 월북하거나 피납되고 사망하는 등 육이오 전쟁의 피해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해방후의 한국연극을 이끌었던 유치진, 서항석 등 지도자 뿐 아니라 이해랑, 김동원 들이, 그리고 그들에게 서 영향받은 장민호, 백성희 등의 연기자들이, 50-60년대를 거쳐 멀리는 오늘날까지도 극예술연구회를 중심으로 한 해방전의 사실주의적 연기의 흐름을 그대로 잇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해방 후 50-60년대를 중심으 로 해서 주로 논한 이 시기는 스타니슬랍스키 연기론으로부터의 본격적 인 영향이 시작된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시기의 사실주의적 연기는 보다 구체적으로 스타니슬랍스키와의 관계를 통해 설명될 수 있 을 것이다.
1) 이해랑과 스타니슬랍스키
나상만은 스타니슬랍스키의 한국수용사를 논하면서 일본유학파를 5세대로 나누고 있다. 그중 3세대는 축지 소극장(1924-29)에서 서구 근대극을 직접 배우고 참여했던 홍해성이나 김우진이며, 4세대는 축지 소 극장의 공연을 관극하고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후에 극연 멤버로서 홍해성과 작업하면서 연극세계를 심화시킨 유치진, 서항석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축지 소극장 이후에 연극을 시작했고 동경학생예술좌 멤버, 혹은 기타 경로로 일본에서 직접 연기나 연출부 경험이 있던 인물들이 5세대를 이룬다고 하는데 본 항목에서 다루는 이해랑, 김동원, 이원경을 비롯해, 이진순, 안영일, 이서향, 허집, 주영섭, 이광래 등이 여기 속한다고 한다. 이들 4, 5세대가 일본에 있던 시기는 스타니슬랍스키에 대한 많은 (일어)번역서가 출판되면서 그의 연기론에 대한 이론적 이해가 심화되었던 시기였지만  스타니슬랍스키에 대한 이들의 이해는 상당히 피상적인 것이었다.
 
해방 후 사실주의적 연기에 있어 스타니슬랍스키의 영향은 이해랑의 미국방문에 의해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다시 말하면 직, 간접적으로 일본의 영향권에 있던 한국의 사실주의 연기는 해방 후 미국의 영향이라 는 새로운 요인에 의해 전기를 맞게 된다는 뜻도 된다. 육이오를 전후로 민족진영 측의 대표세력이었던 유치진과 이해랑은 극협과 신협에서 낭 만적 역사극을 주로 공연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정부수립과정에서 미국 의 영향력이 다각도로 미치게 되고 미군정과 가까왔던 이해랑과 유치진은 각각 미국방문과 세계일주를 경험하게 된다. 1955년 미 국무성의 초대로 3개월간 미국의 각 도시와, 뉴욕의 액터즈 스튜디오를 방문한 이해랑은 그때까지 말로만 가끔 듣던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론이 훈련을 통해 습득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당시 이해랑이 목격한 것은 스타니슬랍스키의 심리적 측면을 강조한 리 스트라스버그의 연기지도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시 기 이후의 우리 연기는 이해랑이 터득한 스타니슬랍스키의 심리적, 내면 적 연기의 영향권에 들어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해랑은 귀국 후 연기자로서, 또 연출자로서 아더 밀러나 테네시 윌 리암즈 같은 당대의 미국 극작가의 사실주의 희곡들을 즐겨 공연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시기의 연기에 관한 몇 안되는 구체적 기록 중 두 개가 모두 대사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오사량은 미국에서 갓 돌아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미치역을 맡았던 이해랑이 내면연기를 위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과장되지 않은 낮은 목소리를 냈다고 회고 했으며, 김동원은 1956년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 에서 윌리 로만 역 을 맡아 연기할 때 내면연기를 낮은 목소리로 표현했다고 한다.

이해랑은 1960년대 이후 주로 연출자로 활동하게 되는데 그는 연출 가로서도 스타니슬랍스키에 심취해있었다. 당시 주로 국립극단에서 연출 을 하며 이해랑은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극론은 연극의 진리이며 절대적인 것이다라고 말하며 배우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연기자 출신의 그는 배우술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그는 연기자의 감정은 연기자 의 감정이지, 극인물의 감정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좋은 연출가는 배우들의 내면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보았다.

 

연극의 외관은 꾸며진 거짓일 뿐이라며, “  현실의 그것보다도 내적으 로 압축된 진실한 세계, 그것이 진정한 연극의 세계가 아닌가?하는 데로 생각을 모아간 것이다. 그의 연극론, 연기론의 핵심은 커튼뒤의 삶이다. “속된 배우는 연극 현장의 인생을 표현하고 있지만 진실한 배우는 연극 속에 또 하나의 커튼으로 가려져 있는 인생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무대 위에 보이는 것이 연극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랑은 일생 리얼리즘을 신봉하며 한국의 근대극을 이끌어왔 다. 그러나 이해랑의 연출은 이런 이상주의적 측면 때문에 이해랑식”, “낭만주의적”, 혹은 리얼리즘의 한국적 기형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3.1970-1980년대 

 

이해랑에 의해 일기 시작한 내면연기의 바람은 70년대를 전후해 스 타니슬랍스키 이론서의 불균형한 소개에 의해 더 심화되고 고착된다. 해방 전부터 스타니슬랍스키를 소개하는 글들이 홍해성, 안영일, 허집 등 의 글 속에 부분적으로 포함되어 진실한 연습과정’ ‘내적 생활등에 대한 언급이 있어 왔고 1960년대부터 스타니슬랍스키에 대한 이론서들이 조금씩 번역되어 소개되기 시작했다.

 

1967년에 출간된 한재수의 배우술은 당시 일어와 영어로 번역된 여러 연기서적들을 나름대로 요약해 스타니슬랍스키 연기시스템과 섞어서 저술한 책이다. 당시로서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론의 핵심을 상당히 잘 전달한 저서인데 왠지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미국유학에서 돌아온 양광남은 1970년 스타니슬랍스키를 영어본에 입각해 요약한 연기론 을 펴내기도 했다.

 

앞의 책들이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론을 간접적으로 소개한 글들이라 면 1970년에는 드디어 배우수업 이 오사량에 의해 영어판으로부터 일어중역으로 성문각에서 출판되었다. 그런데 번역된 배우수업은 스타니슬랍스키 본인이 쓴 저명한 저서이니 만큼 영향력도 대단했지만 부작용도 너무 컸다. 잘 알려져 있듯이 엘리자베드 햅굿이 번역한 영어본 자체가 스타니슬랍스키의 원본을 심하게 왜곡한 것인데다가 일어로 중역된 번역이 너무 난해해서 연기자들의 기피증을 불러일으킬 정도였고 일본 역자의 후기를 생략함으로써 심지어 초기 저서인 배우수업 만이 스타니슬랍스키의 유일한 연극이론서라는 오해까지 주었던 것이다.따라서 1985년 성격구축이 다시 번역되어 나오기 전까지 대부분의 국내 연극인들은 나머지 저서에 관해 모르는 채 지내게 되었다.

 

그 결과 국내에서 스타니슬랍스키는 최근인 90년대 초반까지도 난해하고 막연한 내면연기의 대명사로만 자리잡게 되었다. 그 후 1971년 이광래에 의해 라빠뽀르트의 배우의 작업(수련), 1976년 소냐 무어의 스타니슬랍스키 연기론 이 김의경에 의해 번역, 연재되었으며, 1980년에는 스타니슬랍스키 연기론을 요약하는 김윤철의 석사논문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성격창조이론에 관한 연구가 나오기도 했으나 배우수업 이 야기한 오해를 교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처럼 해방후 1970-80년대까지 국내에서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전모 가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연기론의 일부인 내면연기 만이 기형적으로 번지게 되었다.

 

1970-80년대는 전반적으로 서구에서 도입된 실험극 열풍과 전통연희 에 대한 관심으로 사실주의극과 연기에 대한 관심이 많이 수그러진 시기였다. 그런 중에도 1985년에 역시 오사량 번역으로 성격구축이 간행 되었으나 배우수업 만큼의 관심은 끌지 못했다. 따라서 스타니슬랍스키 에 대한 관심은 90년대에 들어 연극환경의 변화와 함께 다시 그의 연기론이 일반적 관심을 끌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전모가 소개되지도 못했고, 지속적으로 연구되지도 못했고, 실제의 훈련에도 적용되지 못했던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론은 이 시대의 일반적 연기자들에게는 별로 인식되지 못한 상태였다.

최근 1990년대 이전까지 스타니슬랍스키는 그저 막연한 대상이었다고 회상한다. 일반 배우들에게는 그저 이름과 함께 심리적 연기를 주 장한 사람 정도로만 알려져 왔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1950년대에 신파극 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스타니슬랍스키가 자주 거론되었었고 1960-70년 대 이후에는 다양한 서구의 사조가 수입되면서 스타니슬랍스키에 대한 인지도나 관심은 줄어들었다고 회고한다.
 

 

4.1990년대 이후 : 목표와 행동 미국과 러시아 유학생들의 귀국

 

1986년 미국에서 귀국한 배우 최형인이나, 영어로 스타 니슬랍스키 관련 서적을 읽고 1993년 스타니스라브스키 연극론 을 통 해 그의 전모를 체계적으로 소개한 김석만의 존재는 그 영향력의 면에 서 홍해성이나 이해랑과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 사실주의적 연기 의 변화에서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일어 중역 을 통해 스타니슬랍스키를 접했던 전 세대150)와 달리 영어권에서 스타 니슬랍스키 시스템의 전모와 연기를 유학하고 돌아오기 시작한 세대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확동을작한 90년대 이후라는 시기는 80년대의 정치적 긴장이 사라지면서 가치 관과 감각의 다양화가 회복되기 시작하고 젊은 세대의 자기표현의 욕구 와 예술의 대중화가 맞물리기 시작하면서 대학의 연극영화과에 대한 관 심이 증폭되기 시작하던 시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의 작업의 본질적 의미는 스타니슬랍스키 자체를 소개했다기 보다는, 그 동안 도제식이거나 관습적으로만 행해져왔던 연기 일반에 대해서 비교적 구체적이면서 도 분석적인 접근을 시도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이시기에 이르러 목표, ‘행동 같은 연기의 기본적 개념들이 연기현장에서 비로소 거론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의 연기론은 그 이전에는 몰랐던 전혀 새로운 것이라거나 스타니슬랍스키를 본격적으로 가르친 것이라기 보다는 전시대의 연기론 에서 결핍되었던 최소한의 논리와 체계성을 갖추기 시작했으며 그것을 연기훈련 현장을 통해 구체적으로 적용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국내의 스타니슬랍스키 연기의 지형은 1990년대 중반부터 다 시 한번 크게 바뀌기 시작한다. 그 계기는 러시아 유학파인 나상만, 여 무영, 김태훈, 전훈, 이항나 등이 귀국하기 시작한 데서 찾아질 수 있다. 이들은 동구권 및 소련연방의 해체와 몰락이 이루어진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에 러시아로 갔던 유학생들로서 스타니슬랍스키 연기의 근 원지인 러시아에서 실기와 이론을 통해 직접 스타니슬랍스키에 기반한 연기를 배워왔던 것이다. 이들은 귀국 후 실제 극단을 조직해서 연기나 연출에 참여할 뿐 아니라 개인 연기 스튜디오나 대학을 비롯한 각종 교 육현장에서 연기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들어 스타니슬랍스키와 관련해서 그동안 의식되지 못했거나 잘못 알려진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것 은 이해랑의 시대까지도 당연히 받아들여졌던 전제를 해체하는 것이었 는데, 즉 스타니슬랍스키 연기론이 곧 사실주의 연기는 아니라는 점이다. 우선 러시아의 연기교육기관들 자체가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 자체를 그대로 가르치고 있지 않다.
 
러시아에서 1992-99년까지 수학하고 돌아온 김태훈은 그곳에서의 연기교육이 공통적으로 스타니슬랍스키에 기반하고 있으며 기본적인 시스템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자체를 가르치는 학교는 드물고 현재 각 교육 기관에 따라 다소간에 변형되고 차별화된 연기훈련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러시아의 연기교육 뿐 아니라 공연에서도 더 이상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을 그대로 재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연극은 스타니슬랍스키 연기론을 기본적으로 존중하면서도, 비록 체홉의 희곡이라고 해도 대단히 다양한 양식적 표현에 의해 공연되고 있다.
 
다시 말해 스타니슬랍스키의 본산이라고 할 러시아의 연기교육과 공연은 기본적으로 스타니슬랍스키에 기반하고 있으면서도 다양한표현을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이다. 이제 스타니슬랍스키는 사실주의와의 상동관계라는 그간의 상식이나 오해를 넘어서기 시작한다. 물론 사실주의 연기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론이 가장 잘 적용될 수 있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5.1990년대 이후(2): 토착화-소극장 창작극과 한국화된 사실주의극의 가능성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연극계는 또 다른 변화의 시대를 맞게된다. 마당극을 비롯한 창작극의 우세와 중심 해체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은 서구 지향적, 서구 중심적 경향을 감소시키면서 지역 독자적, 혹 은 한국적인 관점을 자연스럽게 회복한다.
 
80년대 이후 창작극의 우세가 시작되고 90년대 이후 서구 명작 정전의 해체화가 일반화되면서 창작극 과 번역극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대부분 미숙하더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극이 선호되고 서구의 명작은 해체되어 우리의 이야기로 재구성되기 일쑤였다. 이처럼 창작극 내지 한국적으로 재해석된 작품이 주류를 이루게된 과정에서 사실주의적 연기를 비롯한 연기 일반에도 자연스 럽게 변화가 왔다.
 
당연히 연기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어왔다. 그런데 1990 년대를 전후해서부터 무대와 연기에서 이러한 경향이 점차 사라져가기 시작했다.이런 변모양상을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로, 이 시기부터 무대에서 서 양인을 흉내내는 어투나 제스쳐가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동안 어투 상의 서양인 흉내는 무엇보다 서양의 원작 희곡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 서양식 어투는 전반적으로 문어체의 번역이라든가 어순이 어색한 번역의 결과였으며, 그밖에 T.V. 외화의 우리말 녹음상의 관행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서양식 어투가 창작극 의 우세와 한국적 정서가 바탕이 된 재해석 공연들에 의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어깨를 움찔하는 행동이나 불필요한 손가락질 등 서구인의 제스쳐를 흉내내는 연기 역시 같은 이유로 인해 줄어들기 시작했다.
 
둘째로, 서양인을 나타내는 분장으로 노란 가발이나 코 높이기 분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셋째로, 우리 응접실 에서 구두를 신고 생활하는 것 같은 어색한 관행이 사라지는 대신 예컨대 온돌 장판과 같은 사실적인 생활공간이 연기의 배경으로 등장했다. 이처럼 서구 모방적인 컨벤션들이 사라지거나 우리 것으로 대체되면서 연기에 있어서도 보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한국인의 생활과 정서를 반영하는 연기가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이 외에 1990년대 이후의 연기에 보다 자연스럽고 생기 있는 사실성과 아이덴티티를 불어넣은 요인으로서 이 시기 배우들의 가치관이나 삶의 태도의 변화를 들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정치적 관심이 줄어들고 경제 가 활력을 얻으면서 소위 신세대로 일컬어지는, 다원적 가치관과 개성을 존중하는 젊은 세대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전시대 배우들과 달리 이 신세대 배우들은 자신감 위에서 다양한 삶의 한 방식으로 연기를 선택한 경우가 많다. 이들은 번역극으로 연기를 공부했던 그들의 전 세대 연기자들과 달리 창작극을 통해 연기를 시작했고, 어린 시절부터 외국영화나 비디오들을 통해 자연스런 연기감각을 익혀온 세대다. 자연히 서 출발하는 자연스러움과 생동감을 지닌 연기를 쉽게 터득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변화들은 로부터 비롯되는 자발성을 중시하는 스타니슬스키 연기론에 한 발 더 다가간 것이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한국인 로부터 출발하여 한국인으로서의 사실적인 연기 하게 된 것을 뜻한다.
 
사실주의적 연기에 있어 한국적 정체성의 추구와 그를 향한 변모는 이 시기의 극장의 크기, 즉 배우와 관객과의 관계가 재조정되기 시작했 다는 사실과도 관련을 맺게 된다. 1980년대부터 팽배하기 시작했던 상업 극은 1982년 공연법의 개정과 함께 대학로 전역에 많은 소극장들을 만들어냈다. 한편 포스트모더니즘과 맞물린 당시의 변화의 하나는 기존의 명작 번역극이나 대한민국 연극제용 대형 공연 같은 중심 지향적무대가 아니라 젊은 연극인들의 자기만의 이야기를 다룬 변방적창작극들이었 는데 이런 창작극들은 혜화동 일번지를 비롯한 몇 몇 소극장을 중심으 로 활성화되게 된다.
 
우리의 경우 90년대 이후의 소극장이라는 공간은 심리적이며 섬세 한 연기와 또 다른 방향의 연기를 가능케 했는데 그것은 관객과의 사이 의 일류젼의 거리 대신에 마당극 식으로 관객 자체를 의식하며 관객과 함께, 하나의 장에서,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관객과 함께 노는방식의 연기였다.
 
그 중 박근형의 극사실주의 주목할만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연극에서 연기는 이 양자의 중간 정도에서 모순 속의 긴장을 형성 하고 있는 경우에 속한다. 박근형은 때로는 포스트 모던한 감각을 구사 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일상의 곤궁함과 남루함에 대한 희극적이며 극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억눌린 광기와 분노를 드러내는 작품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이끄는 극단의 연기자들의 연기는 기본적으로 사실주의적 계열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의 주된 작업은 혜화동 일번지와 같은 100석 미만의 초미니 극장에서 이루어져왔다. 그의 능청스런배우 들은 관객과 극도로 밀착된 공간에서 이중의 역할을 해낸다. 일반적으로 그의 배우들은 매우 작고 사실적인 공간 속에서 극도의 현실감이 불러 일으키는 생경한 비현실감을 동시에 창출한다는 느낌을 준다.
 
1990년대에 들어 사실주의 연기의 논리와 체계가 다시 정비될만한 무렵에 다른 한편에서 한국적 연기의 정체성 문제나 소극장 위주의 공연, 그리고 포스트모던의 경향들로 인해 사실주의적 연기의 체계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다. 예컨대 사실주의적 연기의 기본 덕목인 일류젼의 개념이 소극장 공간의 유희성에 의해 도전을 받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나름의 사실주의적 연기를 위한 연기체계나 미 학적 수립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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